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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푸른 지붕 역할을 하는 문화CEO 될 것 - (사)영남판소리보존회 부이사장 정 정 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02.10
첨부파일0
추천수
3
조회수
1834
내용
“아리랑을 들으면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에 찡한 감동이 오듯, 우리 전통문화는국악인들만의 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기업인 정치인, 언론인, 국가기관 공무원분들이예술인들과 하나가 되어 목표를 가지고
문화를 키워낼 때, 문화강국 국가 브랜드급의 공연은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정정미, 2013년 12월 17일 대한민국모범기업인대상, 문화예술부문 대상 수상소감 부분 -



소한이 지났다. 봉덕동에 있는 영남판소리보존회로 가는 동안 바람이 맵찼다. 2층에있는 연습실로 들어서자
어린 아이들이 가야금을 뜯고, 북을 치며 소리연습을 하고있었다. 방학이라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와서 합숙연습
을 한다고 했다.
정정미 영남판소리회 부이사장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눈이 크고 맑았다. (사)영남판소리보존회는 지금으로
부터 20여 년 전, 영남지방이 국악의 불모지에 다름없었을 때 고(故) 만정 김소희 명창과 모정 이명희 명창이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법인전환은 2004년에 했다. 정정미 부이사장의 어머니는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인간
문화재,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제 제8호, 이명희 명창이다. 이명희 명창은 우리나라 최고의 국악인 가운데 한 사람
인 김소희 국창의 애제자다.
“어머니께서 김소희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 2년 동안 병구완을 했어요. 그때 저도 김소희 선님께소리를 사사
받았지요. 제가 지금은 인간문화제인 어머니의 이수자입니다. 이수자는 전수자가 되어 5년이 경과하면 일정
자격시험을 거쳐 이수자가 됩니다. 어머니이자 스승이기도 한 이명희 선생의 소리와 국악을 널리 알리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 부이사장에 따르면 이명희 명창의 김소희 선생에 대한 애정과존경은극진했다고 한다. 1995년김소희 명창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경북 청도에 있는자신의 판소리 전수소에서 스승을 모시고 간호했다. 6개월
동안의 지극한 간병 덕분에 스승의 병은 호전되어 3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것과는 달리, 그 후로도 삼년을
더 살았다. 이명희 명창은 스승의 임종이 임박했음을 알고, 급히 스승의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내려가, 스승의
장지를 돌보고있었다.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마지막까지 다한 것이다.



“전라도는 국악에 대한 지원이 이곳 영남지역과는 차원이달랐어요. 그만큼 영남지역은 국악의 불모지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김소희 명창과 이명희 명창이 비영리민간단체를 만든 것이, 지금 영남판소리보존회
의 모태가 된 셈이지요. 어머니는 나라에서 지정하는 중요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무형
화재를 선택하셨어요. 서울에 거주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중요무형문화재의 규정도 있었지만, 고향에서 소리를
키워보고자 하는 도전적인 마음이 더 크셨던 것이지요. 마침내 어머니는 1990년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명창
부에서 춘향가의‘오리정이별대목’을 열창하여,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37살의 늦은 나이에 김소희
명창의 문하에 다시 들어가본격적으로 소리를 익힌 지 불과 8년만의 일이지요. 경상도‘보리 문디’가 와서 지역을
 탈환했다며 전라도 지역에서 난리가 났다고 해요. 언론에도 대서특필 되었고요.”
스승이자 어머니의 삶이 워낙 높고 커서인지 어머니의 얘기가 길었다. 이제는 본인의 이야기를 듣자고 했다.
“어머니였지만 저는 아버지 손에 자랐어요. 어머니는 늘 소리를 배우러 다니시고, 소리가 어머니를 빼앗아갔다
고 생각하며 자랐어요. 제가 나이가 들고 소리를 배우다 보니 어머니 마음도 이젠 이해가 되어요. 김소희 선생님
의 제자로 안숙선, 신영희, 이명희 명창이 있었는데, 선생님을 가장 많이닮은 분이 이명희 명창이셨어요. 지난
 2013년 11월 6일에(사)동리문화사업회가 주최하는 제23회 동리대상을 우리어머니께서 수상하셨어요. 동리가
누구입니가? 판소리의효시인 신재효 선생아닙니까? 그 큰상을 또 영남에서 수상하셨으니 자랑할 만한 일이지요.”
또 어머니 이야기다. 정 부이사장에게 이명희는 떼어놓을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정부의 예산을 최소한으로 받는
대신, 기업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받아서 문화메신저의 역할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우리 국악에 대한 조그마한 관심이라고 가져주신다면, 그분들의 뜻을 모아 전통문화
를 활성화시키는 문화 CEO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예술 하는사람들은 고정수입이 없어서 고생하는데, 생계에
신경을 쓰면 예술에 집중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꽃집을 직접운영해서 꽃집에서 나오는 수익의 10%를
국악공연을 위해적립하고 있어요.”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그는 주문자의 이름을 팸플릿에 빼곡하게 새겨, 그들에게 전통공연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아리플라워’라는 전국꽃배달서비스회사를 운영한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기업에서 적극적인 후원을 해준다면, 후일에는‘아리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숙원사업인 창작
공연을 펼쳐 보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외가 쪽의 기예를 물려받았다. 외할머니가 국악을했고, 어머니 이명희는 이미 이름난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외삼촌은 동국대에서 피리를 전공하는 교수다. 그리고 이모는 국립창극단 가야금 수석반주자다. 어머니는 1남
1여인자식들을 거두기 위해 공사장을 전전하며‘함바집’을 했는데, 어머니 37살이 되던 해에, 한국일보 기자로 있던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가야금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것이 계기가되어 김소희 명창의 문하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
다고 한다.
이명희 명창은 194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14살 되던 해, 양아버지이자 대금의 명인,
한범수 선생의 권유로 한국정악원에서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면서 국악에 입문한다. 그때 원옥화 선생에게 가야
금 산조, 박귀희 선생에게 가야금 병창, 양아버지 한범수 선생에게 양금,박록주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여기
서 평생을 두고 옆에서 모신 만정 김소희 선생을 만나,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다가 1976년에
결혼, 1남 1녀를 둔 주부로 살다가 37의 나이에 다시 예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저는 소리를 배울 때, 엄마라고 투정도 못 부렸어요. (눈물)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소리를 배우고 나가면 청소와
뒷정리는 제 몫이었어요. 어머니의 정이 늘 그리웠지요, 그러다가저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마가 되고 보니,
또 제 딸아이둘에게 소리를 가르치다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어머니의 공연
일정과 서류 등을관리하는 몸종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웃음)”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또래들 보다 소리가 나았음에도불구하고 어머니는 자기를 큰 대회에 내보내주지 않
았다고했다. 입상성적이 대학갈 때도 영향을 미치는데, 어머니는“남들이 나를 선생으로 인정해서 레슨비를 주
었는데, 그 아이들보다 너를 먼저 앞세우면 나는 스승이 아니다”하며 늘자신을 뒤로 물리쳤다고 했다. 이명희
명창의 꼿꼿한 인간성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 부이사장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판소리 이수자이기도 하지만, 문화경영자로도 느껴졌다. 그녀는‘드림
컴퍼니아리’의 대표이기도 하다. 전통공연을 보다 체계화해서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전통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되, 영상과 조명, 의상 등을 현대화함으로써 공연의 대중성을 보다 높이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인터뷰 하는 이 공간이‘국악愛숲’인데요. 사람들이숲을 통해 치유를 하듯이, 이곳이 국악의 숲이 되기를 바라
는 저의 바람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김소희 선생님으로부터 소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배웠고, 아버지
에게 문화기획을 배웠으며, 어머니에게 예술적 기능과 예술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
님에게 서운한 점도 많았지만, 지금은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예술인의 딸이자, 우리 전통문화를 공부하는 이수자로
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그녀는 이제 명창 이명희의 딸이 아닌, 문화기획자이자 문화 CEO로서우뚝 서고 싶다고 밝혔다. 정 부이사장의 딸,
박은서(13살) 박은진(7살)도소리를 한다. 4대가 소리인생을 함께하는 셈이다. 그녀는 명창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은‘국악의 지붕’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국악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푸른 지붕’이라고 얘기했으니, 국악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얘기였다. 포부가 크고 맑았다.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려고 정 부이사장이 북채를 잡았다.
김소희 명창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만정제(동편제, 서편제가 있듯이 만정 김소희 선생의 호를 따서‘만정제’라고
일컬음)’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넉넉하면서도 엄격한 소리였다.

글_ 김수상 기자 / 사진_ 윤군도 기자

 
 
 
 
출처 : 우먼라이프 2월호(www.womanlif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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